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판토 해전 (문단 편집) == 배경 == 레판토 해전의 발단은 [[베네치아 공화국]], [[합스부르크 제국]]과 평화 조약을 유지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 1570년 6월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였던 [[키프로스]]를 침공한 것이었다. 1489년 베네치아 공화국에 합병된 키프로스는 이슬람 세력권인 [[아나톨리아]]와 [[레반트]], [[이집트]]에 둘러싸인 채 동지중해 한복판에 홀로 떠 있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섬이었다. 동지중해 전체의 무역로에 대한 통제, 본국의 지원 없이도 자급자족이 가능케 하는 비옥한 농토와 이를 기반으로 재배되는 설탕과 목화 등 여러 이점들 때문에 키프로스는 [[크레타]]와 더불어 당시 베네치아의 중요한 해외 영토였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이점은 그만큼 이슬람 세력에서 눈독 들이고 공격할 확률도 크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평시에 자급자족이 된다는 것이지 일단 침공이 시작되면 베네치아로부터의 지원이 필수적인 상황이니... 때문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평화적으로 키프로스를 지키려고 하였다. 키프로스를 차지한 이후 베네치아는 키프로스 왕국의 보호국이던 [[맘루크 왕조]]에 매년 8천 두카트의 공납금을 바쳐 키프로스의 안전을 보장받았고, 오스만이 맘루크를 멸망시킨 1517년 이후에는 공납금을 바치는 대상을 오스만으로 바꿔 키프로스의 안전을 지속적으로 보장받았다.[* [[프레베자 해전]] 등 베네치아와 오스만이 동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수십 차례의 전쟁을 벌일 때에도 이것만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매년 공납금을 받아먹으며 키프로스의 안전을 보장하긴 하지만 오스만은 베네치아가 영원히 키프로스를 지배하도록 놔둘 수 없었다. 그저 레반트 지역의 패자 자리에 만족하던 맘루크와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 이후 로마 황제라는 직함을 내세우고 전 지중해 세계의 제패를 노리던 오스만 제국은 3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며 한창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는데, 동지중해 전체를 거의 제패하고 서지중해와 [[아드리아 해]]로의 진출을 노리던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는 자기네 안마당에 우두커니 떠 있는 적성 세력의 전초기지가 눈엣가시처럼 걸렸을 것은 뻔하다. 더군다나 키프로스에 근거지를 둔 기독교도 사략선들이 한창 무슬림 상인들과 메카 순례자들을 노려 오스만의 심기를 돋우고 있었다. 1568년 오스만 제국은 [[헝가리 왕국]]을 두고 수십 년 동안 줄기차게 싸우던 [[합스부르크 제국]]과 화평 조약을 맺은 후 곧바로 칼끝을 [[키프로스]]로 돌렸다. 대제 [[쉴레이만 1세]]의 뒤를 이은 [[셀림 2세]]는 1566년 즉위 전부터 "짐의 첫 번째 목표는 키프로스"라고 선언하며 키프로스 정복을 천명한 상황이었다. [[야사(역사)|야사]]에는 중증의 술 덕후(...)였던 셀림이 키프로스산 와인을 미친 듯이 좋아해서 그 원산지를 차지하기 위해(...) 침공을 단행했다고 하는데, 실제 원인은 셀림의 친구였던 [[포르투갈 왕국]] 출신 유대인 주앙 미케스(João Miques)가 셀림더러 키프로스를 침공하도록 사주한 것이었다. 주앙은 셀림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셀림의 칙명으로 낙소스 공작에 --낙하산--임명될 정도로 셀림과 친하게 지냈는데 악명높은 종교 재판을 피하기 위해 오스만으로 왔다가 셀림과 친해지면서 셀림 즉위 이후 실세가 되었다. 오스만 등에 업힌 주앙은 키프로스를 서유럽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의 새로운 터전으로 만들기 위해 [[파마구스타]]의 유대인들과 공모하다 베네치아에 발각되는 바람에 전원 추방당했고 이에 베네치아에 증오를 품은 주앙은 곧바로 셀림에게 키프로스 침공을 사주한 것이다.[* 오스만이 키프로스를 합병한 이후 주앙 본인은 유대인이 다스리는 키프로스의 부왕이 될 계획이었다. 국기랑 문장까지 만들어놨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1567년 베네치아와의 평화조약을 새로이 갱신하긴 했지만 당시 누구도 오래갈 거라 믿지 않았고, 그야말로 양쪽 다 시간을 벌기 위한 임시 휴전에 불과했고다. 주화파였던 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의 반대파들이 정권을 차지하면서 전쟁 여론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들은 "키프로스는 예전에는 이슬람의 영토였으나[* 7세기 중반 이슬람의 팽창 당시 [[동로마 제국]] 영토였던 키프로스를 잠시 점령한 사실을 가리킨다. 688년 키프로스는 동로마와 이슬람, 양 세력의 공동통치령으로 둔다고 합의하였으나 300년 후인 965년 동로마의 장군 니키타스 할쿠체스가 키프로스의 이슬람 세력을 몰아냈다.] 지금은 이교도들이 점거하고 있으니 다시 수복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게다가 키프로스는 베네치아가 접수하기 훨씬 이전부터 [[십자군 전쟁]]으로 [[예루살렘 왕국]]이 영혼까지 털린 이후 [[기 드 뤼지냥]]이 차지하여 이슬람 세력의 심장부까지 해적질을 걸었던 상징적인 의미도 컸다. 그렇게 주전파의 의견이 채택되면서 오스만의 키프로스 침공이 결정되었다. [[파일:Famagusta.f21f51a6d42e3b33e8482cec855b73cc.jpg]] [[파마구스타]] 성벽에 새겨진 베네치아 사자 이전에도 오스만은 쿨타임 찰 때마다 키프로스에 해군을 파견하여 깔짝대긴 했으나 이번 원정의 목적은 키프로스를 완전히 장악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그 규모는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인구 약 16만 명의 키프로스에는 1만 명 전후의 베네치아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오스만 제국은 8만 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왔던 까닭에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오스만 군은 상륙하자마자 키프로스 전역을 유린했다. 맨 처음 상륙한 리마솔을 시작으로 파포스, 키레니아와 수도 니코시아까지 순식간에 함락당했고 9월에 들어서면 베네치아는 [[파마구스타]]를 제외한 키프로스 전역을 상실했다.[* 이는 병사의 수적 차이도 차이였지만, 키프로스의 주민들이 베네치아에 그리 협조적이지 않았던 탓도 크다. 식민지인 키프로스 주민들을 베네치아 본토 주민들과 똑같이 대하기는커녕 노예처럼 부려먹어서, 오스만 군대를 해방자로 환영하거나 적어도 가만히 추이를 지켜보는 자들이 많았다.] 다행히 파마구스타는 잘 요새화된 지역이었고, 요새와 바로 연결된 항구가 있었서 보급이 용이했던 까닭에 [[오스만 제국군]]은 이듬해 4월까지 포위를 한 상태에서 후속부대의 도착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편 느닷없는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위기를 느낀 베네치아는 [[교황]]에게 열심히 로비를 하고, 교황 성 [[비오 5세]](재위 1566~1572)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재위 1556~1598)가 신성동맹의 소집을 결정하고 1570년 9월에 180척 가량의 신성동맹 연합함대가 구성된다. 하지만 스페인이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그 영향으로 [[제노바 공화국|제노바]] 용병 출신으로 스페인에 의해 연합함대의 사령관에 임명된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가 전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며 '''"나 그냥 돌아갈래"'''라면서 [[시칠리아]]로 뱃머리를 돌리는 바람에 별다른 성과없이 해산(…)되었다. 이 양반은 레판토 해전에서도 별로 한 것이 없어서 전쟁 후 전리품을 나눠가질 때 동맹군 지휘관들에게 고의적인 [[사보타주]] 의혹에 휩싸여 심하게 까였는데, 교전을 하지 않으려고 지시한 고용주인 [[펠리페 2세]]의 의향을 철저히 따랐다고 볼 수도 있다. [[스페인]] 입장에서는 동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의 세력 확대 같은 건 별 관심도 없는 문제였고, 극단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동지중해를 모두 장악한다고 해도 스페인이 아쉬울 일은 거의 없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건 정말 극단적인 견해다. 당시는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로, 스페인의 형제국[* 당시에는 펠리페 2세의 사촌이자 매제 [[막시밀리안 2세]]가 황제였다. 다만 펠리페 2세와 막시밀리안 2세는 [[신성 로마 제국/역대 황제|신성 로마 제국 황제]] 승계 문제로 서로 다툰데다가 종교 차이로 인해 사이가 최악이긴 했다. 펠리페 2세는 골수 [[가톨릭]]이었던 반면 개신교회에 호의적이었던 막시밀리안 2세는 겉으로는 가톨릭을 믿으면서도 신성 로마 제국의 [[루터교회|루터파]]나 [[보헤미아 왕국]]의 후스파에 대해 온건한 태도를 유지했다.]인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오스트리아)|빈]]이 위협받고, 오스만의 지원을 받는 바르바리 해적이 스페인 남부와 이탈리아 해안을 휩쓸고 있었으니, 오스만이 분명 가장 위험한 적수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의 자금줄이 더 이상 지중해 무역이 아닌, [[신대륙]]에서 오는 [[황금]]과 네델란드, 벨기에 지역의 모직물 무역으로 옮겨간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펠리페 2세가 연합함대를 구성하기로 한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의 요청 때문이었는데, 수십 척으로 해전을 벌이는 것은 아무리 잘 나가던 스페인에도 국력에 엄청난 부담을 주는 일이었으니,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레판토 해전 이후 스페인은 파산 선언을 할 정도였으니 뭐. 게다가 1560년, 제르바 섬 해전에서 바르바리 해적들에 패하면서 함선 60척을 날려먹은 이후, 펠리페는 함대 손실에 대해 극단적으로 방어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1564년 몰타 섬 공방전에서 스페인 육군은 오스만 군을 물리치기에 충분한 구원병력을 모았읍에도, '해전을 벌이는 건 용납못한다'는 펠리페의 명령 때문에 지원을 못가 몰타섬을 잃을 뻔했다. 반면, 지중해 교역이 국가의 생명줄이었던 베네치아는 오스만 제국을 막는 것에 국운이 달려 있어 필사적인 입장이었다. 때문에 펠리페 2세 입장에서는 어디까지나 체면치레로 함대를 적당히 보내는 시늉만 하고 싶어했던 것이고, 안드레아 도리아는 이 지시에 충실히 따른 것 뿐으로 당시 스페인의 정황으로 보았을때는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레판토 해전 이전에도 프레베자 해전에서 안드레아 도리아[* 위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의 5촌 할아버지. 이쪽이 더 유명한 인물.]는 함대를 출격만 시켰다 바로 돌아온 일이 있다. 이에 실망한 베네치아는 일단 12척의 갤리선을 동원하여 파마구스타에 일시적인 보급을 하고, 다시 로비 작업에 착수한다. 이번에는 펠리페 2세도 마음을 돌려 적극적인 참여를 결정하고 1571년 5월 다시 신성동맹 연합함대 결성이 선포된다. 그리고 애초에 신성함대를 해산시킨 지오반니 안드레아 도리아 대신 자신의 이복동생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며, 8월 말까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오스만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출항하였다. 사실 스페인 입장에서도 동지중해의 패권 문제가 비교적 국익에 부차적이였다 해도, 당장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을 비롯한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이 스페인 왕실의 영지였거나 제후국이었고, 무엇보다 [[마그레브]] 지방에 기반하여 스페인 동부를 털어대던 바르바리 해적들의 물주가 바로 오스만 제국이였기 때문에 마냥 방관할 수도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